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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희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라는 소설은 우리나라 문학사에 한획을 그은 소설로 소개할 수 있다. 그만큼, 교과서에서도 자주 등장하고, 문학을 접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접해볼 수 있는 소설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최소한 3번 이상은 접해보게 된 것 같다. 고등학생 시절 혹은 그 이전의 시절에 자연스럽게 이 소설에 대해서 접해보았다. 그리고 군대를 다녀온 이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도 접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대학교 4학년 성균관대 영문학과에서 “생태문학의 이해”라는 수업을 들으면서 다시 한 번 접해보게 되었다.

“1970년대 대한민국의 산업화의 부정적인 측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작품”

이 책의 내용과 해석에 대해서는 수많은 학자들이 이미 충분히 잘 설명을 해두었을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다. 간단하게 내용을 설명해보자면, 대한민국의 1970년대 산업과, 공업화 과정에서 발생한 부정적인 측면들을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며, 노동자와 자본가 계층의 대립적인 삶의 모습을 신랄하게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작품 속에서는 “난장이” 가족의 집이 헐리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로 이 작품의 작가인 “조세희 작가“ 역시도 그와 같은 경험을 직접 해보았다고 한다. 집이 허물어지는 것을 경험하고 오는 길에 문구점에 들러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 이야기가 바로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되었다.

실제로 작가가 글을 쓸 때, 1970년대 산업화의 부정적인 모습이 담긴 사진을 집안 벽 곳곳에 붙여놓고 글을 썼다고 하는데, 이는 당시 우리나라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실제적으로 담아내기 위한 작가의 노력이었을 것이다. 또한, 작가는 故 정주영 회장을 직접 찾아가 면담을 나누기도 했지만, 일은 뜻대로 풀리지 않아 좌절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2009년 용산 4구역 철거 현장에도 있었던 조세희 작가”

또한, 2009년 1월 20일에 있었던 ”서울 용산4구역 철거현장“ 화재사건이 발생하며, 인명피해가 발생했는데, 당시 참사 현장에도 조세희 작가는 가 있었다고 한다. 오래 전에 발생했던 일들이 현대에도 벌어지는 것을 보는 상황이 안타깝다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환경에 지배당하는 인간을 그린 자연주의적인 작품“

개인적으로는 작품을 문예사조로 나누는 것을 굉장히 선호하지 않는 편이지만, 이 작품은 ”자연주의적“인 성향이 드러나는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타고난 환경을 절대로 극복하지 못하고, 좌절하고 마는 인간의 모습을 담고 있다는 면에서 이 작품은 “자연주의”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주의 작품은 모두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다는 측면에서 작품들은 큰 인기를 끌지 못하는 편이나, 사회 비판적인 요소를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학적인 가치를 갖는다.

”대조의 수법을 두드러지게 사용하고 있는 작품“

이미 많은 비평가들이 작품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는 작품이기에, 개인적으로 직접 비평을 하기 보다는 성균관대학교 재학 시절, 김원중 교수님이 수업 중에 전해준 이야기를 토대로 글을 정리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이 작품에서는 대조의 수법을 두드러지게 사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난장이가 살고 있는 작품 속 세계는 둘로 나누어진 세계, 즉 대립되는 세계로 모든 것들이 둘로 나누어진 세계입니다. 한쪽 세계는 욕망, 자본으로 상징되는 세계이며, 자본은 결국 기계로 이어집니다. 반대쪽에서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착취당하고 희생당하는 노동자가 있는 세계로 그런 세계에서 인간은 철저히 비인간화되고 근육 운동만 필요한 존재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난장이로 묘사가 됨과 동시에 동물로 묘사가 됩니다. 하지만, 그 곳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조세희 작가는 일상적인 것들로 이러한 세계를 도저히 그려낼 수가 없었는지, 동화적인 이분법을 사용해서 이러한 세계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세계에서는 한 마디로, “사랑이 없는 욕망만이 존재하는 세계”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욕망의 반대는 “사랑이 있는 욕망”도 있다는 것일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욕망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불교에서 “열반”을 뜻하는 말은 불이 꺼지다라는 뜻입니다. 심장의 엔진이 꺼지는 순간 욕망이 사라지는 것이기에, 결국 모든 살아있는 인간은 욕망을 가진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욕망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 욕망 속에서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 핵심일 것입니다.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라는 부분에서 “아버지가 꿈꾼 세상에서 강요된 것은 사랑이었다. 사랑으로 일하고, 사랑으로 자식을 키운다. 사랑으로 비를 내리게 하고, 사랑으로 평형을 이루고, 사랑으로 바람을 불러…” 사랑이 없는 땅은,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것들이 고통받는 세계일 것입니다.

교회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교회 조차도 위선적인 장면으로 보여주는 장면에서는 종교라고 하는 것이 과연 인간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합니다. 결국 신도 공범자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한 것일 것입니다.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고, “사랑”이라는 좋은 말로써,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은 작가의 위선같은 의식이 드러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차원의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현실이 빼앗아가버린 한 차원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 “사랑”이다라고 작가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합니다. 3차원에 사는 사람들과 2차원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뫼비우스의 띠, 클라인씨의 병 같은 것들이 차원의 이야기와 연결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작가는 안과 밖이란느 경계의 허물기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전제를 하고 이 글을 쓴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뫼비우스의 띠는 안과 밖의 구분은 없지만, 실제로 뫼비우스의 띠 한면만을 따라가면 한쪽 면만 맴돌지, 절대로 안쪽을 맴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느 쪽에 속하는 사람들일까?“

결국 작품은 이분법적으로 나뉘어진 세상에 속한, 다른 환경에 처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누구인가? 난장이일까? 거인일까?”

”다시 반복되는 분열의 세계“

과거에도 그랬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분법적으로 나뉘어진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 세상의 부는 소수에게로 쏠리며,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양극화는 더욱더 커지고 있는 현실이다.

이는 아날로그 시대를 넘어서 디지털 시대로 넘어오면서 더욱더 심화되고 있다. 단순히 교육의 기회를 넘어서, 자산의 축적에서도 “디지털”로 넘어가며 “지수”로 상승하고 하락하는 시대이다. 결국, 전체적인 자산의 총량이 상승하는 구조라면, 기존에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상승폭이 더 클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2023년, 2024년에 들어서 세상은 다시 양극단으로 치닫는 분위기다. 좌익과 우익, 양분화되는 개념으로 나아가고 있다. 통합에서 분열의 역사로 다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2010년대는 지구촌 통합의 시대였다면, 2020년대는 다시 분열의 시대로 흘러가고 있다. 미중 패권전쟁, 러시아-우르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하마스의 중동전쟁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분쟁과 양극단의 세계에서 우리의 삶 역시도 당연히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결국, 어찌보면,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 역시도 과거보다 환경만 조금 더 나아졌을 뿐, 70년대 그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분열의 세계를 넘어서, 누군가 강제적인 희생을 당하지 않으면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갈 수는 있는 것일까? 방법이 있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 것일까? 여러 가지 생각을 남기는 책이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