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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욱동 “적색에서 녹색으로 : 생태문학 비평집”

김욱동 작가의 ”적색에서 녹색으로“라는 이름의 책은 ”생태문학 비평집”이다. 생태문학 비평집을 접하게 된 것은 당순한 이유에서였다. 4학년 2학기 졸업을 앞둔 마지막 학기에서 김원중 교수님의 ”생태문학의 이해“라는 수업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접하게 된 이유는 과제를 위함이기도 했는데, 수강하고 있던 과목에서 “우리가 배운 시 중에서 한국의 생태시인과 미국의 생태 시인의 시를 하나씩 선정해서, 그 시에 드러난 시인의 생태적 사유와 특징에 대해서 제출하라.”는 과제를 받았기 때문이다. 과제 분량은 A4용지 2 페이지 분량밖에 되지 않았기에 크게 어려움은 없었지만, 다른 전문 작가들은 비평을 어떻게 쓰는지 궁금했기에 접해보았던 책이다.

“적색에서 녹색으로 : 생태문학 비평집”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생태문학 비평집이다. 그렇기에 책의 내용도 절저하게 ”환경“과 ”생태문학“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첫 부분에서는 타이타닉을 통해서 환경 문제를 찾아보는 시각을 갖는다. 타이타닉을 지구에 비유하며,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구조이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생태 시”를 소개하며, 시가 어떤 특징을 갖는지, 어떤 측면에서 생태시라고 볼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시인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 시를 썼을지에 대한 내용으로 이어나간다.

“언어의 기표와 기의는 임의적이고 관습적이다.”

특히 기억에 남았던 부분으로는 스위스의 언어학자가 주장한 ”언어의 기표와 기의는 임의적이고 관습적이다.“라는 주장을 우리나라의 생태 시를 소개하면서 그렇지 않다며 반론을 제기하는 점이었다.

우리나라말의 ”나무“라고 하는 것은 영어의 ”Tree”, “일본의 “き(키)”, 중국어의 ”슈무(树木)”에 비해서 기표(소리)와 기의(의미)가 잘 맞아떨어진다고 저자는 말한다. “나무”라는 말만 들어도 하늘을 향하여 곧게 서 있는 푸른색의 나무를 떠올리게 된다는 것이다.

“환경에 관한 관심을 자극하는 시”

환경문제를 언급하고 있는 시를 현재의 상황과 연관시키며, 우리 모두 환경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내용으로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는 부분이 흥미롭기도 했다. 잘 쓴 생태시와 약간 아쉬운 생태시에 대해서도 비교하며,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 어떤 쪽인지에 대해서 제시하는 측면도 흥미롭게 다가왔다.

미국의 비평가 “수잔 손탁”은 예술이란 강간이 아니라 유혹이라고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예술의 힘은 강요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끌어당김에 있다. 이러한 점을 보면, 오규원 시인의 동시집 ”나무 속의 자동차“에 실린 ”길“이라는 작품에서 앞으로 녹색문학이 나아가야 할 길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 하늘에는
  • 새가
  • 잘 다니는
  • 길이 있고
  • 그리고 하늘에는
  • 큰 나무의 가지들이
  • 잘 뻗는
  • 길이 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 : 월든“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월든“의 저자로 유명한 헨리 데이빗 소로우에 관한 글도 등장한다. 생태문학이라면 뺴놓을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고, ”월든“이라는 작품을 이미 접해보았기에 더욱더 흥미롭게 다가왔다.

생태문학에 대한 비평서로, 여러 다양한 생태문학에 대한 내용을 접할 수 있었던 책이다. 과제를 준비하면서 보았던 책이지만, 과제를 위함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볼만한 책이다.

또한, 책을 접한 덕분에 과제 역시도 잘 작성해서 제출할 수 있었는데, 제출한 과제는 아래와 같다.

”과제 : 한국의 정현종 시인과 미국의 “Gary Snyder”의 생태적인 사유와 특징 비교“

최근 ‘지속가능한 성장’, ‘녹색 성장’, 등의 구호를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즉 환경 생태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어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비단 사회적인 관심뿐만이 아니라 문학에서도 환경, 생태적인 요소에 관한 관심은 지속적으로 있어왔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녹색 문학’, ‘문학 생태학’, ‘생태시학’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여기에서는 우리나라의 정현종 시인의 “구름의 씨앗”이라는 시와 미국의 Gary Snyder 시인의 “Ripples on the Surface”라는 시에서 나타나는 시인들의 생태적인 사유와 특징을 한번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두 시인의 시에서 나타나고 있는 형식적인 부분과 사상적인 부분, 그리고 시로 끌어내기 위한 생각의 과정 등을 생각해보면 유사한 점이 많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우선 정현종 시인과 Gary Snyder 시인의 시의 도입 부분에서는 형식적인 측면과 사유의 과정 측면 모두 잘 드러납니다. 정현종 시인은 구름, 즉 자연의 관찰을 통해서 사색을 하며, 그 것에서 자연 생태계의 핵심 원리 “순환”이라는 과정을 이끌어 냅니다. 지구상에 있는 생명체는 모두 각자 따로따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지구 전체가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인 것처럼 각각의 개체 하나하나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주체와 객체가 결국은 같은 위치에서 자연 생태계의 원리인 “순환”에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시의 첫 연 “바다가 망가져 / 에밀리양이 죽으면 / 구름도 없고 비도 내리지 않을 테니까요.” 부분에서 이러한 점은 잘 드러납니다. 한편 Gary Snyder의 시에서도 이러한 부분은 비슷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시인은 바다의 Ripple, 물결을 관찰하면서, 흑동고래 무리의 사냥 방식을 관찰하면서 자연은 한권의 책도 아니고, 그 자체로 “퍼포먼스”라고 시에서 이야기 합니다. 또한 사유의 과정을 넓혀가면서 역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이분법적인 대립적인 관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은 결국 하나이며, 같은 공간에서 함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객체라는 인식이 드러납니다. 이러한 내용은 “The little house in the wild, / the house in the house.”라는 부분에서 잘 드러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시의 형식적인 측면에서, 내용적인 측면에서 사고의 전개과정 측면에서 두 시는 상당히 비슷한 면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생태적인 사상에 대해서도 두 시인은 상당히 비슷합니다. 이미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두 시인의 기본적인 생각은 인간과 자연에 선을 그어놓는 이분법적인 사상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은 모두가 하나이며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부분에 있어서는 서양에서 근대 과학이 발달하는데 이론적 기초를 닦아 준 르네 데카르트의 사상과 상반되는 시각을 가진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동물이나 식물이 인간과 달리 영혼이 없다”라고 하여 하찮게 여기고 업신여겼습니다. 그는 암소의 경우에는 살아 있는 짐승이 아니라 ‘젖을 짜는 기계’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암소는 한낱 인간에게 완전식품이라는 우유를 제공하는 유용한 기계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프랑스의 현대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 역시 존재를 “실존”과 “존재” 두 가지로 나누어서 보았습니다. 존재는 어떤 것에 대한 기능을 미리 설계해서 만든 존재를 뜻하는 것을 뜻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지우개라고 하는 것은 미리 그 기능을 예상해서 그렇게 되도록 설계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반면, 실존의 경우에는 예상되는 기능도 설계도도 없이 존재하는 것을 뜻합니다. 인간과 같은 존재는 실존이라고 그는 주장합니다. 두 시인은 데카르트 사상과는 다르게 인간과 인간 이외의 것에 다른 가치를 매기는 이분법적인 사고와는 다르게 생명 그 자체로의 가치에 주목하며 인간과 인간 이외의 것을 같은 가치로 보는 일원론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정현종 시인은 “자(尺)”라는 시에서 인간중심적인 사고에 깊은 의문을 품습니다. 정현종 시인이 보는 세상에는 “자(尺)”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나무와 물고기와 새와 같은 생물은 물론 흐르는 물과 같은 무생물까지도 하나같이 자(尺)라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자인 줄 모르니 / 참 좋은 자요 / 스스로 잴 줄을 모르니 / 더없는 자이다.” 심지어 이들이 인간들이 만들어 내는 잣대보다 더 참다운 잣대를 가진다고 하는데,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사물을 공평하게 잴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Gary Snyder 역시 “Song of the Taste”라는 시에서 먹는 행위를 “Kissing the lover in the mouth of bread: / lip to lip”이라고 표현하며 연인에게 입을 맞추는 행위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부분에서 빵과 같은 무생물조차도 인간과 같은 생명체, 인격체로 바라보는 Gary Snyder의 사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부분에 있어서 오로지 인간만이 영혼을 가진다고 주장한 데카르트의 사상에 반기를 드는 모습을 취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사상에서 기초해서 보면 두 시인은 실존의 존재영역을 인간에서 자연으로, 우주 전체로 넓히는 사유를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시인은 모든 면에서 닮아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연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시를 쓰는 영감을 얻는 곳에서도, 두 시인의 국적, 사용하는 언어만 다를 뿐 특별히 두 시인에게서 다른 부분은 찾을 수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자연을 보호하고 환경을 지키는 세 가지 큰 영역의 담론을 기준으로 두 시인의 미묘한 차이점을 한번 찾아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과학적 담론입니다. 이는 생태학자를 비롯한 과학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담론을 말합니다. 이 담론에서는 자연은 학자들이 과학적 방법론으로써 연구하는 지식의 대상일 뿐입니다. 두 번째는, 규제적 담론으로 환경 정책을 세우고 결정하는 제도의 담론을 말합니다. 세 번째는, 문학적 담론으로 문학 예술가들이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가치 또는 정서적 힘을 말할 때 쓰는 담론을 가리킵니다. 자연을 흔히 영혼이나 초월적 존재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문학적 담론은 생물중심적입니다. 이러한 점과 관련하여 정현종 시인의 “구름의 씨앗”이라는 작품에서는 문학적 담론 부분이 잘 나타납니다. “그 아무것도 잘 모르는 제가 전에 /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구름을 / 노래한 게 엉뚱한 게 아니었어요.”라고 하는 부분에서 구름을 두고 인간의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것이라고 언급하는 것은 엉뚱한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나, 조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엉뚱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곧 밝혀집니다. 구름이 없으면 비가 내리지 않고 비가 내리지 않으면 곡식이 자랄 수가 없게 됩니다. 곡식이 자라지 못하면 인간이 먹이를 구하지 못해 생존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니 그 말은 틀린 말이 아닌 것입니다. 또한 “생물학도 기상학도 / 해양 물리학도 지구화학도 / 그 아무것도 잘 모르는 제가 전에”라고 하는 부분에서는 과학적 담론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정현종 시인의 다른 시 “밤하늘에 반짝이는 내 피여”라는 시에서는 이러한 과학적 담론 부분이 더 잘 드러납니다. 시의 첫 부분에 과학적인 사실이 들어있는 기사를 소개하고 난 후 시가 시작합니다. 한편, Gary Snyder 시인의 경우 정현종 시인과 마찬가지로 문학적 담론 부분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The little house in the wild, / the wild in the house.”의 부분에서는 얼핏 들으면 모순되는 것처럼 들리나, 조금 생각해보면 인간이 살고 있는 집 역시 자연의 일부이고, 자연 역시 집의 일부라고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인간이 거주하는 영역과 전 지구적인 자연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닌 그 자체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Gary Snyder 시인의 경우에는 정현종 시인과는 다르게 과학적 담론보다는 규제적 담론에 부분에서 조금 더 두드러져 보입니다. “For All”이라는 시에서 “I pledge allegiance to the soil / of Turtle Island,”라는 부분에서는 이러한 시인의 자연 보전에 관한 결심이 잘 드러나며, 또 다른 시 “Mother Earth : Her Whales”라는 시에서는 자연을 파괴하는 행위를 일삼고 있는 각 나라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이러한 내용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시의 3연에서는 브라질의 숲 파괴 행동을 비판하며, 5번째 연에서는 일본의 고래 사냥을 비판합니다. 7연에서는 중국의 사막화에 대해서 비판 의견을 표출하고 있습니다. 9연에서는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키고 있는 미국을 비판합니다. 이 시가 스톡홀름에서 개최된 환경 회의의 모습을 보고 회의에서 각 나라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고 분개해서 쓴 시임을 볼 때, 그리고 실제로 Gary Snyder 시인이 환경운동에 앞장 선 것을 감안할 때, Gary Snyder 시인의 사상에서는 규제적 담론 영역에서도 두각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시인의 시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생태적인 사유와 특징, 그리고 두 시인이 가지는 미묘한 차이점에 대해서 한번 찾아보았습니다.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두 시인의 사유는 인간과 환경을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보는 이원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역시 인간과 같은 가치의 영혼을 지니고, 자연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그 자체로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관하여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정의란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것이다.”라는 이론에 살펴볼 때, 현재 인간이 지구에서 하고 있는 행태를 살펴보면 과연 우리가 자연을 이용하고 파괴하고 착취하는 과정에서 자연에게 해로운 것을 줄 권리가 있는 것인가 하는 사유를 다시 한 번 하게 만듭니다.

”적색에서 녹색으로 : 생태문학 비평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