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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대한제국의 황궁 “덕수궁”

서울에는 조선시대의 5대 궁궐을 찾을 수 있다. 조선 5대 궁궐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이다.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에서 경복궁과 창덕궁이 주로 중심에 있었던 반면, 덕수궁은 조선왕조 시기에는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던 궁궐이다.

하지만, 대한제국 시기 황궁으로 쓰이면서,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중심 무대가 되었던 곳이 덕수궁이기도 하다.

“월산대군의 저택으로 시작한 덕수궁”

덕수궁은 원래 예종 1년인 1469년 남이의 역모사건에 엮였던 조영달의 집 터였다. 역적이란 이유로 조정에서는 조영달의 집을 몰수했고, 1470년 성종 1년에 성종이 이곳을 세종의 적8남 영응대군의 부인 송씨에게 내려주었다. 1년 뒤, 송씨가 이 집을 다시 왕궁에 바치자 이름을 연경궁으로 짓고 왕실의 별궁으로 삼았다.

1472년(성종 3년)에는 의경세자의 사우인 의묘를 연경궁 후원에 세우기로 했다. 의경세자의 장남인 월산대군은 제사를 맡으면서 이곳을 하사받았고, 연경궁은 월산대군의 저택이면서 의경세자의 제사를 모시는 곳이 되었다. 이후 1475년(성종 6년) 의묘의 위패를 경복궁 안에 있는 연은전으로 옮겨 모시면서 연경궁은 월산대군의 저택으로만 남았다.

성종 이후 이곳은 월산대군 저택으로 불리며 그저 그런 왕자 1의 집에 불과했다. 그러나 약 1세기가 지난 후 월산대군 저택은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된다.

“정릉동 행궁”

임진왜란 때 의주목까지 피난갔다가 환도한 선조가 도성 내의 궁궐들이(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모두 불타버려 거처 할 곳이 없자 월산대군의 저택을 개 보수해 임시 궁궐로 사용하면서 정릉행궁 또는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월산대군의 저택이 온전했던 이유는 왜군이 이곳을 주둔지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월산대군의 저택으로는 궁궐 공간이 현저하게 부족하여 불편이 야기 되었기 때문에 주변 민가들을 대거 징발하여 궁궐로 증축, 연결하여 썼다.

지금 덕수궁에 남아 있는 전각들 중 나중인 대한제국시절에 지어진 중화전 일대와 석조전을 제외하고, 즉조당과 석어당 등 오래된 전각들을 보면, 궁궐이라기 보다 권세 있는 양반집의 모습처럼 보이는 곳이다.

선조는 임진왜란 이후 줄곧 이 정릉동 행궁에서 거처하다가 중건 중인 창덕궁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승하했다.

“광해군에 의해 경운궁으로 승격되다.“

광해군 원년인 1601년에 마침내 창덕궁이 중건되었지만, 공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광해군은 보충 공사를 재차 명하여 약 2년간 더 정릉동 행궁에 머물렀다. 이후 창덕궁으로 옮겨갔지만 이후에도 다시 정릉동 행궁으로 돌아와 오랫동안 거처하기도 했다. 그 이유는 풍수지리적으로 불길하다는 이유로 창덕궁을 꺼렸기 때문인 듯 하다. 광해군이 창경궁, 경희궁 등 여러 궁궐을 마구 건설한 것은 근본적으로 창덕궁에 거주하기 싫어서였다. 광해군은 마침내 정릉동 행궁에 경운궁(慶運宮)이라는 이름을 내려 정식으로 궁궐로 승격시켰으며, 경운궁 확장 공사를 벌여 궁역 내에 여러 전각을 새로 지었다. 그러나 곧 인경궁에다 경덕궁(경희궁)까지 착공하자 물자가 부족해지면서 도리어 경운궁에 새로 짓던 전각들을 도로 해체하여 경덕궁 건설에 사용했다. 또한 소성대비(인목왕후)를 이곳으로 유폐했다.

이후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인조가 이곳 경운궁 즉조당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이것은 인조의 본의가 아니라 철저히 타의(인목왕후)에 의한 것이었다. 인조반정으로 창덕궁이 거의 전소되었지만, 정전인 인정전과 그 주변 외전 일대만큼은 용하게도 피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능양군은 정궁인 창덕궁에서 즉위식을 치러 정통성을 확보하길 원했다. 그런데 의외로 인목왕후가 “능양군이 직접 경운궁으로 올 것”을 명하면서 차기 왕과 기싸움을 벌였던 것이다. 결국 능양군(인조)은 경운궁까지 와서 인목왕후에게 엎드려 조아린 후에야 간신히 즉위식을 치를 수 있었다. 그러나 즉위식은 경운궁에서 치렀지만, 인조는 바로 경운궁을 떠나 화재로 폐허가 된 창덕궁으로 들어갔다.

인조의 조치를 통해 경운궁은 단 전각 2채 만이 남아 정릉행궁 시절보다 더 조촐해졌다. 이후 경운궁은 이후 왕실에서 왕실 내 토지 및 재산 관리 역할을 하기 위한 별궁 명례궁을 설치한 정도를 빼고는, 별 다른 존재감 없이 아관파천이 일어날 때까지 약 274년간 역사에서 잊힌 궁궐이 되었다.

“대한제국의 황궁”

인조반정 이후 이곳은 오랫동안 버림받았다가 근 274년 후인 1897년(건양 2년) 고종이 아관파천 후 환궁할 때 경운궁에 거처하면서 구한말 역사의 중심지로 재등장했다. 고종은 죽을 때까지 경운궁에서 지냈고, 이후 대한제국의 중요한 사건은 경운궁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다만 1907년(융희 원년) 11월 순종황제가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법궁(황궁)의 지위도 창덕궁으로 옮겨갔다.

고종이 이어할 당시 경운궁은 민간에는 그 이름조차 잊혔던 상태로, 당시 민간 서적인 《한경지략》에서는 ‘왕가의 작은 별궁인 명경궁(明慶宮)’으로 소개했다. 고종이 넓고 좋은 다른 궁궐들을 놔두고 원래 민가였으며 이제는 고작 건물 2채만이 남아 있던 버려진 좁은 별궁인 경운궁에 애착을 보인 것은, 다름이 아니라 러시아공사관, 미국공사관, 영국공사관 등과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 인근은 외국 공사관 밀집지역이었다. 미국, 영국, 러시아공사관 외에도 프랑스공사관, 독일영사관이 근처에 있었다. 그래서 이 지역은 공사관 구역으로 불렸다. 또한 미국과 영국 선교사들을 비롯한 다른 외국인들까지 주로 이 일대에 머물렀기 때문에 한성 내의 서양이나 마찬가지인 곳이기도 했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경복궁을 포위 점령했던 사건이나 을미사변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고종으로서는 외국 공사관에 둘려싸여서 어떤 나라, 특히 일본이 무력 도발을 할 수 없는 중요한 위치였던 경운궁은 특히 각별했다. 

러시아공사관에서 머물면서 내외로 환궁 압력에 시달리던 고종은 1896년(건양 원년) 경운궁 개수를 명하여 환궁을 준비했다. 경운궁은 인조 원년인 1623년에 대거 축소되어 원래 민가였던 즉조당과 석어당 2채만 달랑 남아있던 상태였다. 당연히 정궁으로 쓰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고종은 우선 침전인 함녕전과 서재인 보문각,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사성당(선원전) 등 당장 필요한 건물들을 급한대로 지은 상태에서 1897년(건양 2년) 2월에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정전으로는 1902년(광무 6년)에 중화전이 완공될 때까지 5년 간 즉조당을 활용했다.

고종은 경운궁을 황궁(정궁)으로 조성하기 위해 대대적인 공사를 이어나갔다. 겉으로는 옛 궁궐을 보수 · 중건한다고 했지만 원래 경운궁에 남아있던 전각이 2채 뿐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궁궐 하나를 통째로 새로 짓는 것에 가까운 대공사였다. 특히 정전인 중화전은 창덕궁의 인정전을 본따 지은 복층양식으로 단층인 창경궁의 명정전이나 경희궁의 숭정전과는 격이 달랐다.

중화전을 중심으로 전통적인 동양식 전각들을 세워가면서 동시에 서양식 건물인 돈덕전, 동양의 양식을 흉내낸 서구식 건물인 정관헌 등도 이 무렵에 지었다. 그리고 서양식 정전으로 활용할 목적의 석조전도 이때 착공했는데 워낙 큰 규모여서 그런지, 경술국치 이후에 완공되었다.

1902년(광무 6년) 경운궁 공사는 1차적으로 일단락되어 새로운 정전인 중화전을 비롯한 주요 전각들이 완공되었다. 그때까지 5년 동안 경운궁의 정전은 즉조당이었다. 당시 사진들을 보면 1902년에 완성된 경운궁의 규모가 지금보다도 훨씬 컸음을 알 수 있다.

”근현대사의 주무대가 된 덕수궁“

덕수궁은 구한말 근현대사 역사의 중심에 있었다. 1905년 (광무 9년)에 경운궁 수옥헌에서 일제의 강압과 을사오적의 매국 행위로 인해서 을사늑약을 체결당한 장소이기도 하다.

”현대적인 건축물과 전통적인 건축물의 조화“

덕수궁은 대한제국 역사의 중심에 있었던 궁궐로 대한민국의 근현대사, 역사의 중심에 있던 무대이다.

그래서 그런 것인지, 조선의 다른 궁궐에 비해서 현대적인 건축물을 많이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복원을 하고 있는 경복궁이나, 창덕궁, 창경궁 등의 궁궐과 비교해보면, 서양식 건축물을 더욱더 많이 받아들인 모습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현대적인 건축물 사이에서 기존의 조선 궁궐 형식의 건축물이 함께 자리하고 있어서, 근세에서 근대로, 그리고 현대로 시대의 흐름과 변화를 느껴볼 수 있는 궁궐이기도 하다.

”대한제국 시절의 1/3 수준으로 줄어든 덕수궁“

덕수궁은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등을 거치면서 수난을 겪었다. 이로 인해서 현재는 대한제국 시절의 1/3 이하로 그 면적이 줄어들게 되었다. 덕수궁 주변에는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로마네스크)과 성가수녀회 본원, 성공회 서울교구장 공관, 주한 영국대사관, 주한 러시아대사관, 주한 캐나다대사관, 덕수 초등학교 등이 들어서면서, 예전에 비해서 축소되었다.

“서서히 복원되어가는 덕수궁”

덕수궁은 현재 서서히 복원과정을 거치며 조금씩 복원되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과거 덕수궁 터였던 지역에 이미 다른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 만큼, 완벽한 복원은 불가능할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화문 일대 주변의 현대적인 건물 사이에서 과거와 현대의 조화가 되는 경치를 만들어내는 서울의 명소이기도 하다.

입장료는 현재 개인 기준으로는 1,000원이며, 시간에 맞추어 가면 문화 해설 등을 무료로 들어볼 수 있다. 또한, 수문장 교대식 등의 행사와 같이 과거에 없던 행사들도 하나씩 생겨나고 있어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을 할 수 있는 장소로 거듭나고 있다.

또한, 덕수궁은 현재 상시로 야간 개장을 하고 있어 저녁에도 궁궐을 둘러볼 수 있다. 밤에 둘러보는 궁궐의 경치는 낮과는 또다른 느낌을 자아낸다.

“서울,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중심, 덕수궁”

  • 주소 : 서울 중구 세종대로 99
  • 전화번호 : 02-771-9951
  • 개방시간 : (화-일) 9:00 -21:00 (마지막 입장시간은 운영시간 1시간 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