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비리그 3대 명강의로 손꼽히는 강의가 있는데, 첫 번째는 하버드대학교 마이클 센델 교수의 ”Justice(정의)”, 두 번째는 예일대학교 셸리 케이건 교수의 ”죽음(Death)”, 세 번째는 하버드대학교 탈 벤 샤하르 교수의 ”행복(Happier)”이다.
세 강의는 ”철학”적인 개념에 대해서 논리적인 추론을 해나가며,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스스로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도록 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셸리 케이건 : 죽음(Death)”
셸리 케이건(Shelly Kagan) 교수는 1995년부터 예일대학교 철학(사회사상/윤리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예일대학교에서 “죽음(Death)“을 주제로 한 강의를 선보이기도 했는데, 책에서 소개하기를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시간이 더 흘렀으나, 더 오랜 기간 최고의 명강의로 손꼽히지 않았을까 싶다.
“죽음에 대한 내용을 철학적으로 사유해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는 서적“
책에서 담고 있는 내용은 셸리 케이건 교수가 “죽음”을 주제로 강연을 하는 내용을 정리해둔 것이다. ”죽음“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깊이 이해하나가며,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서 숙고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해준다.
책에서는 철학적인 개념을 사용해나가며, 심오한 느낌을 전달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려운 철학적인 개념만 사용하지는 않는다. 철학적인 개념을 사용하지만, 이해하기 쉬운 설명과 비유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책의 초반부에서는 다양한 질문으로 시작한다.
- ”과연 죽은 다음에도 나는 존재하는가?“
- ”사후에도 삶이 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기 위해서 아래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 ”나는 누구인가?“
- ”인간은 어떠한 존재인가?“
”영혼은 과연 존재하는가?“
인간에 대한 설명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하고 있다. 한 가지는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원론적인 입장, 다른 하나는 물질주의로 인간은 육체 그 자체이고, 정신은 육체적 기능에 지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두 가지의 큰 개념 중에서 어느 것이 더 그럴듯한 개념인가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숙고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최선의 설명으로서의 추론”
애매모호한 상황을 풀어나가기 위해 “최선의 설명으로서의 추론”이라는 기법을 사용한다. 이는 다른 방식이 아닌 오직 특정한 방식으로만 어떤 현상을 설명할 수 있을 때, 추론의 과정으로 그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우선 ”영혼“의 존재가 있다는 이원론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를 가지며, 추론을 이어간다. ”과연 영혼의 존재를 받아들여야만 설명이 가능한 것이 있는가?“를 찾아내는 과정을 거치며, 그는 단호하게 ”없다.“라고 결론을 맺는다.
물질주의 역시도 같은 방식으로 추론하며, 결론은 이원론과 물질주의의 “무승부”로 맺는다. 서로 완전한 논리로 무장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직까지는 시기상조라고 셸리 케이건 교수는 말한다.
“데카르트”의 주장인 “육체 없이도 정신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내 마음과 몸은 서로 다른 존재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파이돈“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의 “영혼불멸설”에 대해서도 그는 차근차근 반론을 들어가며, ”영혼은 없다“라는 결론에 가까워지는 주장을 한다.
”죽음의 본질은 무엇인가?“
”죽음(Death)”이 갖는 본질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육체적인 관점을 갖는 것과 인격적인 관점을 갖는 두 관점의 사이에서 죽음의 시점이 달라질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친다.
육체적인 관점에서의 죽음은 ”몸(Body)“의 기능이 중단되는 시점을 죽음이라고 보는 반면, 인격적인 관점에서는 ”몸(Body)“의 종료 시점이 아니라, 생각하고, 사랑하고, 대화하고, 자의식을 갖는 “P” 기능의 종료 시점을 죽음이라고 본다고 말한다.
”죽음은 왜 나쁜 것인가?“
저자는 죽음이 왜 나쁜 것인가에 대해서도 추론을 통해서 풀어나간다. 죽음이 나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라는 자신이 존재할 때,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죽고 나면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기 때문에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될 수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결국 죽음이 나쁜 것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만 나쁠 뿐이다. 하지만, 존재가 사라지는 것, 즉 비존재가 나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상대적인 기회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으로 본다.
이러한 주장을 “박탈이론”이라고 이름을 붙인다. 살아있으면 얻을 수 있는 좋은 것들을 박탈해버리기에 죽음을 나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죽음은 언제 나쁜 것인가?”
그렇다면, 죽음은 언제 나쁘게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사유를 통해서 설명한다.
죽음이 언제 나쁜지 알아보기 위해서 “에피쿠로스”의 글을 참조한다. 글 속에는 “오로지 존재할 때만 나쁜 것이 될 수 있다.“라고 하는데, 이는 위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또다른 주장인, ”루크데타우스“의 경우에는 내가 없던 과거와, 그리고 앞으로 내가 없을 과거에 대해서도 생각을 한 학자이다.
그는 내가 없을 미래가 나쁜 것이라면, 내가 없었던 과거 역시도 나쁜 것이 될 수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나, 이러한 주장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루크데타우스“가 직접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을 박탈이론과 연결시켜서 설명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용어가 등장한다. ”쉬모스(Schmoss)”라는 개념으로, 이는 “아직 갖고 있지 않지만, 언젠가는 갖게 될 상태”로 정의한다. 이것을 상실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정의하고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사유를 통해서 죽음이 언제 나쁜 것인지에 대해서 추론해나가며, 결국 저자도 ”박탈이론“에 동의한다. 살아있으면 얻을 수 있는 좋은 것들을 박탈해버리기에 죽음을 나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영생은 좋은 것인가?“
영생에 대해서도 사색해나간다. 영생은 과연 좋은 것일지, 나쁠 것일지에 대해서 사유해나간다.
조나단 스위프트의 소설 ”걸리버 여행기“의 후반부에는 ”영생하는 마을“이 소개된다. 소설 속에서는 영생을 아주 좋지 못한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 몸은 계속해서 늙어가는데, 삶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무엇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죽음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았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할 문제이다.
이 부분에서 “쾌락주의”가 등장한다. 쾌락과 고통이 본질적인 선악의 유일한 사례라고 가정하면, 쾌락은 본질적으로 좋은 유일한 요소로, 고통은 본질적으로 나쁜 유일한 요소로 보는 관점이다.
삶을 그릇에 빗대어 표현하는 ”그릇이론“도 소개된다. 그릇이론은 크게 2가지로 나누어서 볼 수 있는데, 첫 번째, 중립적 그릇이론의 경우, 삶의 가치를 “0”이라고 보고, 삶의 내용물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수치는 좋은 것의 총합이 많다면 ”+“로 나타날 것이고, 반대로 나쁜 것의 총합이 많다면 ”-”로 나타날 것이다.
두 번째, 가치적 그릇이론은 삶 그자체를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고 내용물 외에 추가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이론이다. 여기에는 온건버전과 환상적 버전으로 나뉘는데, 온건보전의 가치적 그릇이론의 경우 “-”로도 총합이 나타날 수 있지만, 환상적 가치적 그릇이론은 무조건 총합은 “+”로 나오는 이론을 가리킨다.
- 쾌락주의 : 쾌락(+), 고통(-)로 보는 이론
- 그릇이론
- 중립적 그릇이론 : 삶의 가치를 ”0“으로 보고 좋은 것과 나쁜 것의 총합을 내는 이론
- 가치적 그릇 이론 : 삶의 자체를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고, 좋은 것과 나쁜 것의 총합을 내는 이론
- 온건적 가치적 그릇 이론 : +/- 모두 나타날 수 있음
- 환상적 가치적 그릇 이론 : +로만 값이 나올 수밖에 없음
결국, ”삶“에 어느 정도의 가치를 부여하느냐에 따라서, ”삶의 가치가 “+”로 나올 수도 있고, ”-“로도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삶의 가치를 ”0“으로 둔다고 하더라도, 좋은 것의 총합이 나쁜 것의 총합보다 더 많다면, “+”로 나올 수 있기에 우리의 삶을 “좋은 것”으로 채우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죽음에 대한 태도”
죽음은 필연성, 가변성, 예측불가능성을 가지며, “삶과 죽음은 상호효과”를 갖는다. 이러한 죽음의 속성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지금까지 살펴본 “죽음”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물음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며, 3가지의 반응으로 나누어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 죽음을 부정하는 것
- 죽음을 인정하는 것
- 죽음을 무시하는 것
하지만, 죽음 자체를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적절한 태도가 아니므로, 죽음을 인정하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나간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실수를 만회하기 위한 시간은 매우 짧고 귀하기에 실수를 줄이는 삶의 모습으로 조심스럽게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상에는 수많은 가치있는 일들이 있지만, 그것을 모두 다 하기에는 시간이 터무니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것은 많지만 모든 것은 다 할 수 없다. 결국, 선택과 집중이 요구되는 이유이다.
”자살은 무조건 나쁜 것인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인 “자실”에 대해서도 셸리 케이건 교수는 추론을 이어나간다. 그는 자살이 “단순히” 나쁘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합리성과 도덕성을 기준으로 자살에 대해서 조목조목 따져본다. 우선 합리성을 기준으로 따져볼 때, 자살은 때로는 합리적일 수 있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 있다고 말한다.
도덕성을 기준으로도 조목조목 따져보며 비판한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거나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는 근거는 주로 “결과”이다.
“공리주의”적 입장에서는 결과만 놓고 보며,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실현되면 그것을 도덕적인 것으로 본다. 하지만, 의무론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결과뿐만 아니라 과정에도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여기에 무고한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이 추가된다.
또한, 여기에 “온건적 동의 이론”, 즉, 특정한 상황에서 무고한 사람의 동의가 있을 때에는 무고한 사람에게 피해를 입힐 수도 있다는 이론에 따르면, 결과적으로 자살은 “특정한 상황에서 도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질 수도 있다.
”죽음을 돌아보며,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서 살펴본다.“
삶과 죽음은 서로 정 반대의 개념이며, 어찌되면 연결되어 있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셸리 케이건 교수는 ”죽음“에 대해서 살펴보며, 그의 반대 개념인 “삶”을 어떠한 눈으로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한 번 사는 인생, 어떠한 삶을 사는 것이 후회를 남기지 않고, 충만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어떠한 가치로, 어떠한 철학으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해보는 것은 삶의 방향성을 정함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셸리 케이건 교수 덕분에 “죽음“을 돌아보며, ”삶“을 생각해보는 의미있는 시간을 가져볼 수 있었다.
책의 에필로그 부분에 있었던, 문구로 짤막한 글을 마쳐보도록 한다.
- 죽음은 너무 빨리 오지만,
- 삶의 기회를 받은 것은 행운이다.
”죽임이란 무엇인가? (Death)”
- 저자 : 셸리 케이건 (Shelly Kagan)
- 발행일 : 2023년 2월 24일
- ISBN13 : 9788901269092
- 예스24 : http://app.ac/yj6wj2a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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