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신각(普信閣)은 서울특별시 종로에 위치하고 있는 누각으로 종각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서울 지하철 1호선 종각역과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하철 1호선 개통 당시 종로1가 사거리에 만들어진 종각역의 명칭도 이 누각에서 따왔다.
특히, 보신각은 매년 12월 31일에 열리는 ”제야의 종 소리“ 타종 행사로 잘 알려져 있다.
“여러 번의 변화를 거친 보신각”
건물 자체는 여러 번의 변화를 거쳤다. 최초의 종루는 2층 구조였는데, 임진왜란으로 종루와 종이 모두 소실된 이후 광해군 때 1층 종각으로 다시 중건돼 광복 때까지 보존되었다. 그러나 이 두번째 종각은 6.25 전쟁으로 인해 종만 남긴 채 사라졌고, 1979년에 이르러 옛 보신각 터 옆에 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2층 누각으로 새 보신각을 지었고, 이 건물이 현재의 보신각 건물이다.
서울특별시에서 1990년 6월 18일에 ‘보신각 터’를 서울특별시의 기념물 제10호로 지정했다. 현재의 보신각 건물은 복원도 아닌 아예 새로 지은 것이기 때문에 건물 그 자체는 문화재로 지정받을 수 없고, 원래 보신각이 있던 자리만 기념물로 지정받았다.
“보신각의 역사”
조선 태조 5년(1396)에 경기도 광주에서 만든 종을 청운교 서쪽 종루에 설치한 것이 시초이다. 이후 태종 13년(1413년)에 2층 종루를 새로 짓고 위치를 통운교(現 종로 네거리) 쪽으로 옮겼다. 그리고 세종 22년(1440)에 기존의 정루를 헐고 동서 5간 남북 4간에 2층으로 고쳐 지었고, 세조 7년(1458)에 새로 대종(大鐘)을 만들어서 설치했으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왜군들이 한양을 점령한 동안 종루는 소실되고 대종도 파괴되었다.
광해군 11년(1619)에 종각을 다시 짓고 종도 새로 달았는데, 명례동 고개[3]에 있는 종각에서 종을 옮겨왔다. 원래 이 종은 원각사(圓覺寺)[4]에 있었지만 연산군 10년(1504)에 장악원을 옮긴다고 연산군의 명령으로 원각사를 폐찰했다. 그리하여 그 자리에 덩그러니 있던 종을 중종 31년(1536)에 숭례문 안으로 옮겼고, 선조 30년(1597) 인진왜란 때문에 다시 명례동 고개로 옮겼던 것을 광해군 때 종각을 복구하면서 이동시켰다. 새로 중건된 종각은 본래보다 작게 1층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종각은 고종 연간에 여러 변화를 겪었다. 첫 번째 변화는 고종 1년(1864) 4월 19일 밤 4시경 지전에서 발생한 화재가 번졌으나, 급히 진압하여 종은 피해가 없었으나 종각이 모두 타버려 5월 24일쯤부터 종각의 제 기능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지어졌다. 그로부터 5년 뒤 고종 6년(1869) 9월 4일 두 번째 화재가 인근 시전에서 발생해 종각으로 번졌다. 그러다 10월 29일에는 완전히 제 모습을 찾으며 또다시 조금 변화하게 된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자리가 뒤로 밀려나는 등의 변화도 있었다.
그 후 보신각은 1950년 6.25 전쟁 때 완전히 파괴되었다가 휴전 후인 1953년에 중건하였다. 1971년 서울 지하철 1호선 공사 과정에서 세종 때 지은 옛 종루의 초석이 발굴되었는데, 정면 5칸 측면 4칸 2층 누각이었다고 파악되었다. 이를 토대로 1979년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종루를 새로 지었다. 발견된 주춧돌은 서울역사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1985년에 본래의 보신각종이 노후화되어 종을 새로 주조하고 교체하여 오늘에 이른다. 보신각에 새로 건 종은 성덕대왕 신종(에밀레종)을 복제했다는데, 이 종이 현대 기술로 진짜 에밀레종을 복제해 놓고도 진품의 장중한 음보다 한참 못 미치는 쇳소리가 난다고 까이기도 했다.[9] 종루도 앞서 말한 것처럼 현대에 다시 지은 건축물로 정면 5간 측면 4간의 콘크리트 2층 건물인데, 다시 말해 오늘날의 보신각은 종까지 포함하여 전통 양식을 빌린 현대식 건축물인 셈이다. 안타깝게도 건물은 뒤로 더욱 더 밀려났고, 일제강점기에 바뀐 바라보는 방향 그대로 지었다. 편액도 조선시대에 쓴 것이 아니라 이승만의 글씨를 모각한 것이다.
“서울 종로, 보신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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