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연희동에는 구전으로 전해지는 장희빈 우물터가 있다. 연희삼거리에서 북서쪽 방향으로 이동하면 우물터를 찾을 수 있는데, 이 곳이 바로 ”장희빈 우물터“로 전해지는 곳이다.
”구전으로 전해지는 장희빈 우물터“
장희빈 우물터 일대는 예로부터 연희궁 앞이라 하여 궁뜰이라고 불렸고, 궁동, 궁말, 대궐재, 장희빈 우물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또한, 마을 앞의 느티나무가 정자와 같다고 하여 정자말, 정잣말, 정자동이라고 불리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근처의 궁동 근린공원 아래에는 조선 후기 숙종의 총애를 받던 장희빈의 친정집으로 알려진 오래된 집이 있었고, 그 동쪽 아래에는 장희빈이 사용했다고 알려진 우물이 있었으며, 그 옆에는 500년 가량 된 느티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는 우물터만 남아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장희빈 우물의 유래“
장희빈 우물터 일대는 조선시대 초부터 이궁인 연희궁이 있어 예로부터 이곳은 궁동, 궁말, 궁들, 대궐재, 장희빈 우물이란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최초의 이궁은 정종 3년(1400), 정중이 아우인 태종에게 왕위를 선위 후 이 곳을 피궁으로 사용하여 세종 7년(1425) 8월 연희궁이라 칭하게 되었으며, 이에 궁실관리들과 궁녀들의 사가가있어 궁말 여러 곳에 우물들이 있었다고 하나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간직하고 있는 샘이 바로 “장희빈 우물” 이다.
그 후 숙종(1674~1720) 때 폐비된 인현왕후를 뒤 이은 희빈장씨가 페서인의 몸으로 이 곳 사가에 잠시 머물 때 마셨던 우물로 전해지고 있으나 기름의 고증이나 검증된 바는 없다.
그러나 연희동에서 오래 전부터 구전으로 “이 우물은 장희빈이 마신 물” 이라고 옛 어튼들이 대대로 가꾸어 오고 있어 우리동 보물찾기 사업으로 선정하여 복원하게 되었다.
“숙종의 빈, 경종의 어머니 장희빈“
장희빈은 숙종의 빈이며, 경종의 어머니이다. 숙종보다는 2년 연상으로 본명은 장옥정으로 전해지며, 조선 왕조 역사상 유일하게 궁녀 출신으로 왕비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여인이다. 1688년 소의로 있을 때, 왕자 윤(뒤의 경종)을 낳았고, 다음해 1월 윤이 원자로 봉해지면서 희빈에 오르게 되었다.
그 해 7월 인현왕후 민씨가 폐위되고, 1690년 윤이 세자로 책봉되면서 왕비로 책립되었다. 이후 1694년 4월 민비가 복위됨에 따라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었고 오빠 정희재와 함께 복위를 도모했으나 무산되었다.
1701년 민비가 병으로 죽자, 궁인, 무녀 등과 함께 민비를 무고했다는 서인의 탄핵을 받고 사사되었으며, 숙종은 이후 빈을 비로 승격하는 것을 법으로 금했다.
”연희동의 장희빈 우물터“
연희동의 한적한 동네에서 찾을 수 있는 장희빈 우물터는 잘 복원되어 유지가 되어 오고 있다. 하지만, 방문했던 날에는 우물의 뚜껑이 닫혀 있어서 내부를 볼 수는 없었다.
세월이 흘러서, 이제는 연희궁을 근처에서 찾을 수는 없지만, 장희빈의 추억을 담고 있는 우물터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서울 연희동, 장희빈 우물“
- 주소 : 서울 서대문고 연희로 15길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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